제주고씨세보서(濟州高氏世譜序)
濟州高氏世譜序
氏族之譜昉自歐陽子洎夫蘇明允而尤致謹焉由是以降殆乎家家有譜發凡起例皆權輿於歐蘇而詳略則或不能無彼此之殊盖以傳世遠則支裔繁後屬疏則聚合難故耳日濟州高生泗澄袖其家譜而昉余因慨然歎曰姓高而顯于世者寵稱靈谷派而靈谷之孫世居本土者與坼湖諸宗漠然不相通間嘗修譜者屨而濟人無與焉竊#夫年代浸邈文獻浸微遂至於系序之不可復考乃敢倡議於同鄕諸宗別修派譜永備家乘願有一言以相之余曰善哉若子者可謂篤於追先而周於慮後也自濟而拒涉重#千餘里始達于湖由湖而又陸行千里得抵京師相距踔遠不翅若越人之適燕宜乎分居之後不辨其存沒修譜之初不聞其聲信也凡我 國中之以高爲姓者始皆同本而開城長興巳自分貫異鄕則疏不可以復戚離不可以復合者亦其理勢然也今者濟州之高其本彌遠其枝彌蕃散處南北指不勝僂愽雅之如歐蘇者雖復起來實無以裏猝諸家彙成一#則派譜之作烏可巳也然而高氏諸君子苟能沿其派而溯其源以見夫世德之厚滀後祿之永流則此譜之外千派之同源於乙那者皆是瀛州之族也皆當親睦之巳矣奚論譜書之同不同哉古人所謂惇宗叔族之懿定應如是盍歸而勉之哉
高生前己剏建鄕祠腏享 靈谷而今又遠涉北地克竣譜事上文所云篤於追先者指此而發
【註】
丁未七夕日 通政大夫前行承政院左承旨製 敎兼經筵參贊官 錯誤是正編에 詳細히 記載되었음.
제주고씨세보서(濟州高氏世譜序)
씨족(氏族)의 보(譜)는 구양자(歐陽子)로부터 비롯하여 소명윤(蘇明允)에 이르러 더욱 삼가함을 다하였으니, 이로부터 내려와 거의 집집마다 보(譜)가 있게 되었고 범례(凡例)를 일으킴이 다 구소(歐蘇, 구양수歐陽脩와 소순蘇洵)에서 권여(權輿, 시초)하였으되 상략(詳略)인즉 혹 피차(彼此)의 다름이 없지 못하니, 대개 대(代)를 전함이 멀면 지예(支裔)가 번성하고 후속(後屬)이 소원(疏遠)하면 취합(聚合)하기 어려운 까닭일 뿐이다.
일전(日前)에 제주고생(濟州高生) 사징(泗澄)이 그 가보(家譜)를 소매에 넣고 와서 나에게 인하여 개연(慨然)히 탄식하여 가로되, 「고(高)를 성(姓)으로 하여 세상에 드러난 자로 영곡파(靈谷派)를 총칭(寵稱)하는데, 영곡(靈谷)의 손(孫)으로 본토(本土)에 대대로 사는 자와 탁호(坼湖)의 여러 종중(宗中)이 막연(漠然)히 서로 통(通)하지 못하니, 그 사이 일찍이 보(譜)를 닦은 자가 여럿이나 제주(濟州) 사람은 더불어 함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연대(年代)가 점점 아득해지고 문헌(文獻)이 점점 미미해져서 드디어 계서(系序)를 다시 상고할 수 없음에 이를까 하여, 이에 감히 동향(同鄕)의 여러 종중(宗中)에게 창의(倡議)하여 따로 파보(派譜)를 닦아 길이 가승(家乘)을 갖추고자 하니, 원컨대 한 말씀으로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가로되, 「좋도다. 그대와 같은 자는 가히 조상을 추모(追慕)함에 독실(篤實)하고 뒤를 염려함에 주밀(周密)하다 이를 만하다. 제주(濟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거듭 천여리(千餘里)를 가야 비로소 호남(湖南)에 이르고, 호남으로부터 또 육행(陸行) 천리(千里)를 하여야 경사(京師, 서울)에 이르니, 서로 떨어짐이 아득히 멀어서 월(越)나라 사람이 연(燕)나라에 감과 다름이 없으니, 나뉘어 산 뒤에 그 존몰(存沒)을 분변(分辨)하지 못하고 보(譜)를 닦는 처음에 그 소식(消息)을 듣지 못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무릇 우리나라 중에 고(高)로써 성(姓)을 삼는 자는 처음에 다 같은 근본(根本)이었으나 개성(開城)ㆍ장흥(長興)이 이미 스스로 관(貫)을 나누어 다른 고을에 있으니, 소원(疏遠)하면 가히 다시 친척(親戚)이 될 수 없고 떨어지면 가히 다시 합할 수 없는 것 또한 그 이세(理勢)가 그러한 것이다.
지금 제주(濟州)의 고씨(高氏)는 그 근본이 더욱 멀고 그 가지가 더욱 번성하여 남북(南北)에 흩어져 살아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으니, 구소(歐蘇)와 같은 박아(愽雅)한 자가 비록 다시 일어나 오더라도 실로 창졸간(倉猝間)에 여러 집안을 모아 하나로 이룸이 없을 것이니, 즉 파보(派譜)를 짓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리오.
그러나 고씨(高氏) 여러 군자(君子)가 진실로 능히 그 파(派)를 따라 그 근원(根源)을 거슬러 올라가 저 세덕(世德)의 두터이 쌓임과 후록(後祿)의 길이 흐름을 본다면, 이 보(譜)의 밖에 천파(千派)가 을나(乙那)에서 같은 근원(根源)을 둔 자가 다 이 영주(瀛州)의 족속(族屬)이니, 다 마땅히 친목(親睦)할 따름이지 어찌 보서(譜書)의 같고 같지 않음을 논하리오. 옛사람이 이른바 종족(宗族)을 돈독(惇篤)히 하는 아름다움도 정(定)히 응당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 어찌 돌아가 힘쓰지 아니하리오.
고생(高生)이 앞서 이미 향사(鄕祠)를 창건(剏建)하여 영곡(靈谷)을 철향(腏享, 배향配享)하였고 지금 또 멀리 북지(北地)를 건너와 능히 보사(譜事)를 마쳤으니, 위 글에서 이른바 「조상을 추모함에 독실하다」 함은 이를 가리켜 발(發)한 것이다.
【주(註)】
정미(丁未) 칠석일(七夕日)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승정원좌승지제(前行承政院左承旨製) 교겸경연참찬관(敎兼經筵參贊官) — 착오시정편(錯誤是正編)에 상세(詳細)히 기재(記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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