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고씨구보(濟州高氏舊譜)(갑진보(甲辰譜))
濟州高氏舊譜(甲辰譜)
古之君子 敬其身故尊其所自出 尊其所自出故 愛其出於所自出也雖遠 吾何敢 不尊也 苟其出於所自出 也雖衆吾何敢不愛也 然苟其遠且衆也 吾雖欲欽其尊而極其愛 又何能盡識之而不遺也 嗚呼 此譜牒之所以作也 春秋之際論人必詳其世數 太史公及班史氏欲論次當世賢士大夫 必自陳其世德 如自序叙傳者皆尊其所自出而 譜牒之所由始也 及世敎衰缺 士鮮有知其身之可敬則豈能尊其所自出而 至其出於所自出者 又何暇論哉 以有宋休明之世 子程子猶歎其無百年之家況我 偏荒文獻又遜於中華者乎近世土大夫稍能留意於譜牒 然而鐘鼎貴盛之家 尙多有未遑者盖非力不足也 誠有所不及也 誠能及之力雖不足 亦必成而後己 盖觀於高氏之譜也 濟州高氏其始 神明之冑也 其肇開鴻濛君長一邦 實與羅麗二祖並功匹休 及受封於雞林登仕於勝國 蠶組蟬嫣勳德重累遂爲望族 支庶布濩 殆遍東陸可謂盛矣顧輓近以來稍若不振 繼冠冕者旣不多 得姓者又多散落 遐遠或邈然不相通知 於是高宗子孫相與慨焉顧歎 合議修譜中外諸族 皆各以其系取乘而來徵焉 遂考其代序明其似續 又遠稽前史旁蒐他譜 鼻祖以下事業名蹟之可傳者 媲匹墳墓之可記者 亦皆謹書之鳩工募財付諸剞劂 將以廣布之 噫高宗諸子孫俱以弱支綿力 出於數十百代後 能退究於數十百代之久 傅求於數十百派之廣 使先世系舊德 旁統別緖一開卷而暸然 其有不誠而能爲是乎 其有不知敬其身而能尊其所所自出 愛其出於所自出若是其誠乎 昔蘇老泉序某家譜曰觀是譜者 孝弟之心油然然後 可以成是譜也 譜旣成鎭垕斗華二高生 以主事諸君之意 累問序於余 盖以眞望高王母氏 開城君守謙孫漢良之女 世派亦載是譜故也 眞望何敢辭 抑余竊有感焉 高氏諸宗同出耽羅而 後來稱貫有二三焉 長興氏則盖以 長澤君之後 別籍於長而今則還稱舊貫而 濟陽伯之移封玉山 實在麗朝則其後宜若皆貫于開城而 獨開城君以開受爵子孫籍焉 餘則仍稱濟州而不改噫必 有以也無得以考 是可恨也 姑玆幷及 以俟後之傅聞君子云.
景宗四年甲辰(1724) 季秋
嘉善大夫前行成均館大司成兼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제주고씨구보(濟州高氏舊譜)(갑진보(甲辰譜))
옛 군자(君子)는 그 몸을 공경(恭敬)하는 까닭에 그 자신이 나온 바(所自出)를 높이고, 그 나온 바를 높이는 까닭에 그 나온 바에서 나온 자(者)를 사랑하니, 비록 멀지라도 내 어찌 감히 높이지 않으리오. 진실로 그 나온 바에서 나온 자가 비록 많더라도 내 어찌 감히 사랑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진실로 멀고 또 많으면, 내 비록 그 높임을 공경하고 그 사랑을 다하고자 하나 또한 어찌 능히 다 알아서 빠뜨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아아, 이것이 보첩(譜牒)이 지어지는 까닭이다.
춘추(春秋) 시절에 사람을 논함에 반드시 그 세수(世數)를 상세히 하였고, 태사공(太史公) 및 반사씨(班史氏)가 당세(當世)의 현사대부(賢士大夫)를 논차(論次)하고자 할 때 반드시 스스로 그 세덕(世德)을 진술하였으니, 자서(自序)와 서전(叙傳) 같은 것은 모두 그 나온 바를 높인 것이니 이것이 보첩(譜牒)이 비롯된 바이다.
세교(世敎)가 쇠하여 이지러짐에 이르러 선비 중에 그 몸이 가히 공경할 만함을 아는 자가 드무니 어찌 능히 그 나온 바를 높이겠으며, 그 나온 바에서 나온 자에 이르러서는 또 어느 겨를에 논하리오.
송(宋)나라의 아름답고 밝은 세상으로도 자정자(子程子)가 오히려 백년(百年)의 집안이 없음을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편황(偏荒)한 곳으로 문헌(文獻)이 또한 중화(中華)만 못한 자이겠는가.
근세(近世)에 사대부(士大夫)가 자못 능히 보첩(譜牒)에 유의(留意)하나 종정귀성(鐘鼎貴盛)한 집안도 오히려 많이 겨를이 없는 자가 있으니 대개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진실로 능히 미치면 힘이 비록 부족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룬 뒤에야 그칠 것이다.
대개 고씨(高氏)의 보(譜)를 봄에, 제주고씨(濟州高氏)는 그 시초가 신명(神明)의 후예(冑)라. 그 홍몽(鴻濛, 태초)을 처음 열어 한 나라를 군장(君長)하였으니 실로 신라(新羅)ㆍ고려(高麗) 두 시조(始祖)와 더불어 공(功)을 나란히 하고 아름다움을 짝하였다. 계림(雞林)에서 봉(封)을 받고 승국(勝國, 고려)에서 벼슬에 오름에 이르러 잠조선연(蠶組蟬嫣, 대대로 이어짐)하여 훈덕(勳德)이 거듭 쌓여 드디어 망족(望族)이 되었다. 지서(支庶)가 널리 퍼져 거의 동륙(東陸, 우리나라)에 두루 미쳤으니 가히 성(盛)하다 이를 만하다.
다만 만근(輓近, 근래) 이래로 자못 부진(不振)한 듯하여 관면(冠冕)을 잇는 자가 이미 많지 않고 성(姓)을 얻은 자는 또한 흩어져 떨어짐이 많아 하원(遐遠)하여 혹 막연(邈然)히 서로 통지(通知)하지 못하니, 이에 고씨(高氏) 종중(宗中) 자손이 서로 더불어 개연(慨然)히 돌아보며 탄식하여 합의(合議)하여 보(譜)를 닦으니 중외(中外)의 여러 족속(族屬)이 다 각각 그 계(系)를 취승(取乘)하여 와서 증거하였다. 드디어 그 대서(代序)를 상고하고 그 사속(似續, 계통)을 밝히며 또 멀리 전사(前史)를 상고하고 곁으로 타보(他譜)를 모아, 비조(鼻祖) 이하 사업(事業)과 명적(名蹟) 중 가히 전할 만한 것과 배필(媲匹)과 분묘(墳墓) 중 가히 기록할 만한 것을 또한 다 삼가 이를 써서 공장(工匠)을 모으고 재물(財物)을 모집하여 여러 각수(剞劂, 판각)에 부쳐 장차 이로써 널리 반포(頒布)하고자 하였다.
아아, 고씨(高氏) 종중(宗中) 여러 자손이 다 약한 지파(支派)의 미미한 힘으로 수십백대(數十百代)의 뒤에 태어나 능히 물러나 수십백대(數十百代)의 오램을 궁구하고 수십백파(數十百派)의 넓음을 부구(傅求)하여 선세(先世)의 계통(系統)과 구덕(舊德), 방통(旁統)과 별서(別緖)로 하여금 한번 권(卷)을 열면 요연(暸然)하게 하니, 그 성실함이 없이 능히 이를 할 수 있으리오. 그 몸을 공경할 줄 알지 못하고서 능히 그 나온 바를 높이고 그 나온 바에서 나온 자를 사랑함이 이처럼 성실할 수 있으리오.
옛적 소노천(蘇老泉, 소순蘇洵)이 어느 집안의 보(譜)에 서(序)하여 말하되 「이 보(譜)를 보는 자가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인 뒤에야 가히 이 보(譜)를 이룰 수 있다」 하였다. 보(譜)가 이미 이루어짐에 진후(鎭垕)ㆍ두화(斗華) 두 고생(高生)이 주사(主事)한 제군(諸君)의 뜻으로써 여러 번 나에게 서문(序文)을 물었다.
대개 진망(眞望)의 고왕모씨(高王母氏, 외조모)가 개성군(開城君) 수겸(守謙)의 손(孫) 한량(漢良)의 딸이요 세파(世派)가 또한 이 보(譜)에 실려 있는 까닭이다. 진망(眞望)이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다만 내 가만히 느낀 바가 있으니, 고씨(高氏) 여러 종중(宗中)이 함께 탐라(耽羅)에서 나왔으나 후래(後來)에 관(貫)을 칭함에 두셋이 있으니, 장흥씨(長興氏)는 대개 장택군(長澤君)의 후예(後裔)로써 장(長)에 별적(別籍)하였다가 지금은 도리어 구관(舊貫)을 칭하고, 제양백(濟陽伯)이 옥산(玉山)에 이봉(移封)됨은 실로 여조(麗朝)에 있었으니 그 후예는 마땅히 다 개성(開城)에 관(貫)할 듯한데 홀로 개성군(開城君)이 개(開)로써 작(爵)을 받음으로 자손이 관적(貫籍)하였고, 나머지는 이에 제주(濟州)라 칭하고 고치지 않았으니, 아아, 반드시 까닭이 있을 터인데 가히 상고할 수 없으니 이는 가히 한스러운 일이다. 짐짓 이를 아울러 언급하여 뒷날 전하여 듣는 군자(君子)를 기다리고자 하노라.
경종(景宗) 사년(四年) 갑진(甲辰)(一七二四年) 계추(季秋)
가선대부(嘉善大夫) 전행성균관대사성(前行成均館大司成) 겸홍문관제학(兼弘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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