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자료

二,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

admin 2026.09.14 16:32 57

二, 星主高氏家傳(東文選所載)

耽羅之境 初未嘗有人 其山奇奇曰漢拏 宛在雲海渺茫之上 降其神靈和氣 化生神人于山之北毛興穴 三者同時湧出 曰高乙那良乙那夫乙那而 高乙那卽高氏奧祖也 俱漁獵以爲食 譜云日本國主 生女七人 遣四女于丹狄國 丹狄卽所謂赤狄之種也 命其女三曰西南海有山孕秀生神人三昆季 將建國無婫偶 若輩可往事之 後世子孫必繁衍盛多矣 乘之以全木般 兼備五糓牛馬之種 且使神人衛而送之 至耽羅東海之濱 神子三人 出獵遇之 其衛護神人 乃紅鞓紫杉者也 陵空而去 三子分娶之 卜毛興窟近地以居 數年間産業俱就 其後漸大 至高乙那十五世孫高厚 與其弟高淸 將朝見新羅 有客星先現 觀臺報云異邦神人來朝之徵也 旣而高厚兄弟渡海 初泊耽津 遂至新羅 王喜待之 以客星先現之故 賜高厚爵星主 且令高淸 出王之胯下 愛如己子 爲王子 賜邑號曰耽羅 蓋自耽津至新羅故也 羅史載之甚詳及前朝太祖統三之初 星主高自堅 王子梁且美 卽良乙那之後 改以梁聲相近也 世一朝見 太祖待以優渥 晝日三接 飮食供帳 殆擬王者 自率從至於擢夫 賚予稠疊 盖所以寵異之也 然世襲星主王子而己未有筮仕王國而大顯者 高維始以賓貢 靖王乙酉 首中南省試 明年丙戌李作挺榜第三人 官至右僕射子兆基舊名唐愈 睿王丁亥韓卽由牓登科 仁王朝出入臺閣 好直言敢諫相毅王知戊辰擧 位至平章判吏部事 名迹獵獵有詩集二卷行于世 平章子廷益之子高適 叙其卷端曰 子廷琥職綴三品 與其誠明俱早歿 唯廷益 元王癸巳春 乞退還鄕 先儒崔瀣 註東人文曰 無子有三女 蓋未之知也 高適元王辛酉登第卽人金閨 因覲親還鄕 比及至元八年辛未夏 神義軍三別抄叛耽羅 11年癸酉夏四月 國家濟師討之盡殲 以高適爲留摠管 特令安集餘民 戊寅夏赴朝 親授金牌 甲申 改摠管府爲軍民安撫使事 繼世遂顯焉 五世孫仁旦襲爵 至元辛巳 元朝欲征日本 勑前朝備戰艦九百艘 軍資器仗一切幹辨故 令下耽羅使造一百艘 儲峙應副 亦無有闕 其計皆自仁旦出也 至元21年 又受宣命金牌明威將軍安撫司使29年 以征東行中書省 剳付充耽羅指揮使 至是乃與副使文昌祐 同知金瑄定議 奏達元朝 還屬本國 忠烈王嘉其忠誠 特使譯語郞將鄭恭任良弼宣召 爲星主雲麾上將軍 賜紅鞓紫衣寶盖 賚予不貲 紅鞓寶蓋之賜 自新羅權輿焉 忠烈若曰 自羅代直至于今 殉國赤誠 爲可惜也 星主之職 永世母墮 仁旦傳之同母弟守佐無後 仁旦之子高碩者爲西道副千戶 後碩之家子順良 傳襲星主 弟順元繼之 子戶曹典書高臣傑 洪武己酉 爲西海道副千戶 越七年 玄陵興師討哈赤 後仍以臣傑 爲副千戶 明年乙卯 車玄有內成輩構逆叛亂 殺本國萬戶 臣傑乃與王子文忠傑 議請於國討平之 車玄有之黨知之 三日圍高文二家 盡殺六畜 高文二人 僅以身免 仗國之靈 克正其罪 丙辰丁巳 倭船六百許艘 周廻而入 臣傑中箭 盡心禦之 受職賞 甲子 加星主 仍賜紅鞓紫袍賓蓋及弓矢表裏宣醞 臣傑生四子 曰鳳仁鳳義鳳禮鳳智 仁義俱早逝 鳳禮字伯恭 鳳智字仲明 事我 太祖康憲大王 鳳禮位至摠制 鳳智折衝上將軍 鳳禮以長襲星主而鳳智先卒 子今司醞署令得宗 廬墓盡禮 鄕人皆慕之 告于朝旌異其門閭 今 上甲午 得宗爲義盈庫直長 條列耽羅事宜 上書闕下 盡袪弊 是年秋 上臨軒策中乙科十三人 明年襲星主 累轉爲司憲監察刑曹都管佐郞禮曹佐郞 戊戌秋七月 奉使歸故鄕 士林榮之 得宗謂以吾曰 吾宗肇基毛興之穴 自新羅式至于今 世襲星主 服事王家 赤心無己而俛仰陣迹 非托之文字 懼其湮沒 無以示來裔 然世次譜牒不全 姑以大槪爲請以吾聞伊尹生於空桑 傳說降於傳巖 嘗怪而疑之 及讀生民詩傳 先儒曰天地之始 固未嘗先有人也 則人固有化而生者矣 盖天地之氣生之也 又觀得宗先世如此而後 有以知神人之生 異於人也 宜其碩大顯融 磊砢相望 無落其世職也 况吾得宗 年未立而志愈謙光 觀其奇氣偉節 蔚然有平章之風迹 嗚呼高氏其未艾哉.

永樂14年 丙申秋7月 日(西紀1416年)

資憲大夫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 鄭 以 吾 撰

 

수명편(受命篇) 동문선소재(東文選所載)

탐라(耽羅)의 경내(境內)에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 기이하게 빼어난 산(山)이 있는데, 한라산(漢拏山)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위에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신인(神人)을 산(山)의 북쪽인 모흥혈(毛興穴)에 탄강시켰다. 이때 세 사람이 한꺼번에 솟아났는데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라 한다. 그런데 고을나(高乙那)는 곧 고씨(高氏)의 시조(始祖)다. 모두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먹고 지냈다.

족보(族譜)에 이르기를 「일본국(碧浪國)의 임금이 딸 일곱을 낳았는데, 딸 넷은 단적국(丹狄國)으로 보냈다. 단적(丹狄)은 곧 이른바 적적(赤狄)의 종족이다. 그 딸 셋에게 명령하기를, 「서남쪽 바다에 산이 있어서 그 산이 잉태하여 신인삼형제(神人三兄弟)를 낳았는데, 국가를 세우려하나 배필이 없으니 너희들은 가서 그를 섬기라. 후세에 자손이 반드시 번성하여 많아질 것이다」 하고 그들을 배에다 태우고 오곡(五穀)의 씨앗과 우마(牛馬)까지 갖추고 또한 신인(神人)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그들을 보냈다. 탐라(耽羅)의 동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신인(神人)의 아들 세 사람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그들과 만났는데, 그를 보호하고 온 신인(神人)은 곧 붉은 가죽 띠를 띠고 자주빛 장삼을 입었는데 공중으로 날아서 가 버렸다. 세 사람은 나누어서 그들에게 장가를 들어 가지고 모흥굴(毛興窟) 근처에 자리잡고 살았다. 수년(數年)을 지나는 동안 살림이 모두 이루어졌고 그 후손이 차츰 커졌다.

고을나(高乙那)의 십오세(十五世) 손인 고후(高厚)에 이르러 그의 아우인 고청(高淸)과 장차 신라(新羅)에 조회하려 하는데, 객성(客星)이 먼저 나타났다. 관대(觀臺)에서 아뢰기를 「다른 나라에서 신인(神人)이 조회하러 올 징조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고후(高厚)의 형제가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탐진(耽津)에 닿아서 드디어 신라(新羅)에 이르렀다. 임금은 그들을 반가이 대접하고 객성(客星)이 먼저 나타났기 때문에 고후(高厚)에게 성주(星主)라는 작위(爵位)를 주고, 또한 고청(高淸)은 임금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오게 하고 그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여 왕자(王子)를 삼고, 고을의 칭호를 「탐라(耽羅)」라 하였다. 대개 「탐진(耽津)에서 신라(新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라(新羅)의 역사에 이것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전(前) 왕조(王朝)의 태조(太祖)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직후에 성주(星主)는 고자견(高自堅)이요(고려사(高麗史)에는 고자견(高自堅)의 태자(太子) 말로(末老)에 성주(星主) 왕자작(王子爵) 하사(下賜)함) 왕자(王子)는 양차미(梁且美)였으니 곧 양을나(良乙那)의 후손인데, 양(梁)으로 고친 것은 음(音)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 세대(世代)에 한 번씩 조회하기로 하였는데, 태조(太祖)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여 낮에 세 번씩 접견하며 음식과 접대하는 범절이 거의 임금과 비슷하게 하였고, 데리고 온 사람과 사공에 이르기까지 물품을 중첩으로 내렸다. 대체로 그를 특별히 총애한 것이다. 그러나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를 세습(世襲)하였을 뿐이요, 왕국(王國)에서 벼슬에 올라 크게 드러난 것은 아직 없었다.

고유(高維)가 처음 빈공(賓貢)에 합격하여 정왕(靖王) 을유년(乙酉年)에 남성시(南省試)에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병술년(丙戌年)에 이작정(李作挺)의 방(榜)에서 제삼인(第三人)으로 합격(合格)하여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고, 아들인 조기(兆基)는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였는데 예왕(睿王)의 정해년(丁亥年)에 한즉유(韓卽由)의 방(牓)에서 과거(科擧)에 올라, 인왕(仁王)의 조정에서 대각(臺閣)에 출입하였다. 바른 말을 좋아하며 용감히 간(諫)하였고, 의왕(毅王)을 도와서 무진년(戊辰年)의 과거(科擧)를 맡아 보았고, 직위가 평장판이부사(平章判吏部事)에 이르렀다. 명성과 행적이 뚜렷하였으며 시집(詩集) 두 권이 세상에 간행(刊行)되었다.

평장(平章)의 아들인 정익(廷益)의 아들 고적(高適)이 그 책 끝에 서술하기를, 「아들 정호(廷琥)는 벼슬이 삼품(三品)에 올랐으며, 총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일찍 죽고 다만 정익(廷益)은 원왕(元王)의 계사년(癸巳年) 봄에 은퇴하기를 청하여 시골에 돌아왔다」 하였고, 과거의 학자인 최해(崔瀣)는 동인문(東人文)에 주석을 붙이기를,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하였으니 아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적(高適)은 원왕(元王) 때에 과거에 올라, 바로 금규(金閨)에 들어왔고, 근친(覲親)하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가 지원(至元) 팔년(八年)인 신미년(辛未年) 여름에 이르러 신의군(神義軍)과 삼별초(三別抄)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탐라(耽羅)에 들어와서, 십일년(十一年)인 계유년(癸酉年) 여름 사월(四月)에 나라에서 군대를 물을 건너보내어 그들을 토벌하여 모조리 없애버리는데, 고적(高適)으로 유총관(留摠管)을 삼아 특히 남은 백성을 위안하여 모아들이게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여름에 조정에 들어왔음으로 임금은 친히 금패(金牌)를 내려주었다. 갑신년(甲申年)에 총관부(摠管府)를 군민안무사사(軍民安撫司事)로 고쳤다. 이리하여 세대를 이러가면서 드디어 나타나게 되었다.

오세(五世)손인 인단(仁旦)은 작위(爵位)를 세습하였는데, 지원(至元) 신사년(辛巳年)에 원(元)에서 일본을 토벌하려 하여 전(前) 왕조(王朝)에게 명하여 전투용 함정 구백척(九百隻)과 군수물자와 무기일체를 준비하게 하였다. 명령을 탐라(耽羅)에 내려서 배 일백척(一百隻)을 만들게 하고 물자도 여기에 맞추어서 모자라는 것이 없게 하였는데, 그 계획이 모두 인단(仁旦)에게서 나온 곳이다. 지원(至元) 이십일년(二十一年)에 또 임금의 명령으로 금패(金牌)에 명위장군(明威將軍) 안무사사(安撫司使)의 발령을 받았다. 이십구년(二十九年)에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명령에 의하여 탐라(耽羅) 지휘사(指揮使)에 보충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부사(副使)인 문창우(文昌祐)와 동지(同知)인 김선(金瑄)과 계책을 정하고, 원(元)나라에 아뢰어 본국에 소속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역어랑장(譯語郎將)인 정공(鄭恭)과 임양필(任良弼)을 시켜서 왕명으로 불러들여 성주운휘상장군(星主雲麾上將軍)을 삼고 붉은 가죽 띠와 자주빛 옷과 보개(寶盖)를 내리고 물품을 준 것이 적지 않았다. 붉은 가죽 띠와 보개(寶盖)를 내린 것은 신라(新羅)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충렬왕(忠烈王)이 이르기를, 「신라(新羅)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지극한 정성이 가석(可惜)하도다. 성주(星主)의 직(職)을 영원한 세대(世代)까지 떨어뜨리지 말라」 하였다. 인단(仁旦)이 이를 동복(同腹) 아우인 좌수(佐守)에게 전하고 후계자가 없었다.

고인단(高仁旦)의 맏아들인 고석(高碩)이 서도부천호(西道副千戶)가 되었는데, 뒤에 석(碩)의 맏아들인 순량(順良)이 성주(星主)의 직(職)을 이어받았고, 아우인 순원(順元)이 이를 계승하였다. 그의 아들인 호조전서(戶曹典書) 고신걸(高臣傑)이 홍무(洪武) 기유년(己酉年)에 서해도부천호(西海道副千戶)가 되었는데, 그 후 칠년(七年)에 현릉(玄陵)(공민왕(恭愍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합적(哈赤)을 토벌하고 뒤에 그대로 신걸(臣傑)을 부천호(副千戶)로 삼았다. 이듬해인 을묘년(乙卯年)에 차현유(車玄有)와 내성(內成)의 무리가 역적을 도모하여 난을 일으키고 본국의 만호(萬戶)를 죽였다. 신걸(臣傑)은 곧 왕자(王子)인 문충걸(文忠傑)과 더불어 나라에 청하여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려 했더니, 차현유(車玄有)의 무리가 그것을 알고 삼일(三日) 동안이나 고씨(高氏)와 문씨(文氏)의 두 집을 포위하고 가축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고(高)와 문(文) 두 사람은 간신히 몸을 빠져나와서 화를 면하고 나라의 권위를 힘입어 그들의 죄를 바로 잡았다. 병진(丙辰) 정사년(丁巳年)에는 왜적의 배 육백척(六百隻) 가량이 둘러싸고 들어왔는데 신걸(臣傑)이 화살에 맞으면서도 마음을 다하여 이를 막아내어 관직과 상을 받았다. 갑자년(甲子年)에 성주(星主)의 칭호를 더해주고 그리하여 붉은 가죽 띠와 자주빛 옷과 보개(寶盖) 및 활과 화살을 내려주고 안팎에서 술을 베풀어 주었다.

신걸(臣傑)이 아들 넷을 두었는데 봉인(鳳仁), 봉의(鳳衣), 봉례(鳳禮), 봉지(鳳智)였다. 인(仁)과 의(義)는 모두 일찍 죽었다. 봉례(鳳禮)는 자(字)가 백공(伯恭)이요, 봉지(鳳智)는 중명(仲明)인데,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섬기어 봉례(鳳禮)는 벼슬이 총제(摠制)에 이르렀고, 봉지(鳳智)는 절충상장군(折衝上將軍)이었다. 봉례(鳳禮)는 맏으로 성주(星主)를 습작하여 봉지(鳳智)는 먼저 죽었다. 아들은 지금 사온서령(司醞署令)인 득종(得宗)인데, 여묘(廬墓)를 살면서 예를 극진히 하여 지방 사람이 모두 그를 우러러 보았다. 조정에 보고하여 그 마을 문에 정표(旌表)하였다.

지금의 임금 갑오년(甲午年)에 의영고직(義盈庫直)이 되어 탐라(耽羅)의 사정과 그에 대한 적의한 시책을 조항별로 나열하여 글을 대궐에 올리어 모두 커다란 폐단을 없앴다. 이에 가을에 임금께서 대궐에 나앉으시어 친히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득종(得宗)이 대책(對策)을 지어 을과(乙科) 제십삼(第十三)째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성주(星主)의 작(爵)을 세습받고 여러번 옮기어 사헌감찰(司憲監察), 형조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무술년(戊戌年) 가을 칠월(七月)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가니 인사(人士)들이 모두 그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득종(得宗)이 이오(以吾)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이 모흥혈(毛興穴)에서 기초를 세운 이후로 신라(新羅)로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성주(星主)의 작위(爵位)를 세습하였고, 국가를 섬기어 충성심이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잠깐 동안에 옛 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을 남기지 아니하면 그것이 모두 없어져서 장래의 후손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세대의 차서라든가 가족의 기록이 완전하지 못하여 우선 대략을 적어서 부탁한다」 하였다.

이오(以吾)는 들으니 이윤(伊尹)은 공상(空桑)에서 낳았고, 부열(傅說)은 부암(傅巖)에서 낳았다 하기에 일찍이 괴상스럽게 여기고 이를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생민편(生民篇)의 시(詩)의 전(傳)을 읽은즉 옛 학자가 이르기를, 「천지(天地)가 시작될 때에는 본시 인간이 없었다. 곧 인간은 조화(造化)에 의하여 생겨난 것으로 대개 천지(天地)의 기운이 이것을 낳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한 득종(得宗)의 선대(先代)의 사적이 이러한 것을 보고 나서 신인(神人)의 출생이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몸이 석대(碩大)하며 업적이 뚜렷한 인물이 두드러지게 서로 계속되어 그의 세습적인 관직을 떨어뜨리지 아니함이 마땅하도다. 하물며 득종(得宗)은 나이가 아직 삼십(三十)도 못되었는데 뜻이 더욱 겸손하며 빛나고 그 기이한 기운과 위대한 기절이 씩씩하게 평장(平章)(고조기(高兆基)를 말함)의 기풍과 자취가 남아 있으니 아, 고씨(高氏)의 운수는 그 끝이 없으리로다.

태종(太宗) 십육년(十六年)(서기(西紀) 일사일육년(一四一六年)) 병신(丙申) 칠월(七月) 일(日)

자헌대부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資憲大夫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 정이오(鄭以吾) 찬(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