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瀛洲誌
第一編總首編
一, 瀛洲誌
瀛洲太初 無人物也 忽有三神人 從地湧出鎭山北麓 有穴曰毛興 長曰高乙那 次曰良乙 那三曰夫乙那 狀貌甚偉 器度寬豁 絶無人世之態也 皮衣肉食 常以遊獵爲事 不成家業矣 一日登漢拏山望見紫泥 封木函自東海中浮來欲留而不去 三人降臨就開則 內有玉極函 形如鳥卵 有一冠帶紫衣使者隨來開函 有靑衣處子三人 年皆十五, 六 容姿脫俗 氣韻窈窕 各修飾其坐 且持駒犢五飾之種出置 金塘之岸三神人 自賀曰 是天必授我三人也 使者再拜稽首曰 我東海上碧浪國使也 吾王生此三女 年皆長成而求不得所耦 常以遺歎者歲餘 頃者吾王登姿霄閣 望氣于西溟則紫氣連空 瑞色葱寵 中有絶岳降神子三人 將欲開國而無配匹 於是命臣侍三女 以來 宜用伉儷之禮以成大業 使者忽乘雲而去莫知所之 三神人卽以潔牲告天 以年次分娶之就泉甘土肥處射矢卜地 高乙那所居曰制一都 良乙那所居曰製 二都 夫乙那所居曰第三都 自此以後始成産業 植播五糓 且牧駒犢 日就富庶遂成人界矣 厥後九百年之後人心咸歸于高氏 以高爲君國號乇羅至十五世孫 厚淸季三昆季造般渡海 朝于新羅泊于耽津 新羅盛時也 于時客星見于南方 太史奏曰異國人來朝之象也己而耽羅王來朝新羅王 喜曰予以不德遽得貴客 不亦悅乎 以厚爲星主 以淸 令出袴下 愛如己子 名曰王子東宮季爲徒內 改耽羅 爲南化國各賜衣冠寶盖親送南道車騎輜重大屬百里 自是之後 敬事新羅 世受其 職以修藩臣之禮 至厚十二世孫聃服事 百濟聃卒後曠世不朝 百濟東城王庚申以耽羅不修朝貢 發怒興師率四千騎 親征南塞至武珍州 耽羅王昭聞之遣使乞罪乃止其兵 高麗太祖二十一年戊戌耽羅國王 高自堅 遣太子末老 來朝 仍賜星主王子爵 自後世一朝 見而未有筮仕 王國者 至維始仕焉.(昌慶苑 藏書閣 所藏)
역문(譯文)
영주(瀛州)에는 태초(太初)에 사람과 육축오곡(六畜五穀)이 없었는데 홀연히 삼신인(三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으니 진산(鎭山)(한라산(漢拏山))의 북록(北麓)에 있는 모흥(毛興)이라는 지혈(地穴)이 그 유적(遺蹟)인 것이다.
우두머리는 고을나(高乙那)요 다음은 양을나(良乙那)요 그 다음은 부을나(夫乙那)니 상모(狀貌)가 비범(非凡)하고 도량(度量)이 활달(豁達)하여 진세(塵世)의 속루(俗累)가 없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의복(衣服)을 만들고 고기를 먹으며 항상 수렵(狩獵)으로서 일을 삼으니 가업(家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한라산(漢拏山)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자니(紫泥)로 봉(封)한 목함(木函)이 동해(東海)로부터 떠내려와 해안(海岸)에 머무르거늘 삼인(三人)이 내려와 목함(木函)을 열어보니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관대(冠帶)하고 자의(紫衣)를 입은 한 사자(使者)가 나와 옥함(玉函)을 열은 즉 청의(靑衣)를 입은 처녀삼인(處女三人)이 있어 모두 나이 십오(十五), 육(六)세가 되고 자색(姿色)이 출중(出衆)하여 품질(稟質)이 단아(端雅)하였는데 좌석(座席)을 정제(整齊)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牛馬)와 오곡(五穀)의 종자(種子)를 가지고 금당(金塘)의 언덕에 내놓으니 삼신인(三神人)이 자축(自祝)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 하였다.
사자(使者)가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나는 동해벽랑국(東海碧浪國) 사자(使者)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삼녀(三女)를 낳아 나이 장성(長成)하여 배필(配匹)을 구하지 못하여 주야(晝夜)로 한탄(恨歎)한지 세여(歲餘)가 되었습니다. 저번에 우리 임금께서 자소각(紫霄閣)에 올라 서해(西海)를 바라보시니 자기(紫氣)가 하늘에 연(連)하고 서색(瑞色)이 영롱(玲瓏)한 가운데에 명산이 있는데 삼신인(三神人)이 강림(降臨)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配匹)이 없으므로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삼녀(三女)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의 예식(禮式)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을 성취(成就)하시옵소서.」 하고 사자가 홀연히 구름을 타고 올라가 간곳이 없었다.
삼신(三神)이 이에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어 하늘에 고하고 연차(年次)로 분취(分娶)하였으며 물이 맑고 토지가 비옥한 곳을 선택하여 화살을 쏘아 거지(居地)를 정하였으니 고을나(高乙那)의 거지를 제일도(第一都)(제주(濟州))라 하고 양을나(良乙那)의 거지를 제이도(第二都)(대정(大靜))라 하며 부을나(夫乙那)의 거지를 제삼도(第三都)(정의(旌義))라 하고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드디어 촌락(村落)을 이루었다.
그 후 구백년(九百年)에 인심이 모두 고씨(高氏)에게 돌아왔으므로 고씨를 추대하여 임금을 삼고 국호를 탁라(乇羅)라 칭하였다. 고을나(高乙那)의 십오세손(十五世孫) 후(厚), 청(淸), 계(季) 삼형제(三兄弟)가 배를 저어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조공하여 탐라(耽羅)에 다다르니 신라의 전성시대(全盛時代)였다.
이때에 혜성(慧星)이 남방에 출현하거늘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이국(異國) 사람이 내조(來朝)할 징조입니다.」 하더니 곧 탐라왕(耽羅王)이 내조(來朝)하매 신라왕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부덕(不德)한 나로서 귀객(貴客)을 얻었으니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후(厚)로서 성주(星主)를 삼고 청(淸)은 임금이 무릎가까이 친아들과 같이 사랑하여 왕자(王子) 동궁(東宮)이라 이름하였으며 계(季)는 도내(徒內)를 삼았고 탐라(耽羅)를 고쳐 남화국(南化國)이라 칭하였으며 각기 의관(衣冠)과 보개(寶盖)를 하사하고 친히 남녘 길에 전송하니 거기(車騎)와 치중(輜重)이 백리를 연달았다.
이후부터 신라를 지성(至誠)으로 섬겨 대대로 그 봉작(封爵)을 받고 예절을 지켜왔는데 후(厚)의 십이세손(十二世孫) 담(聃)에 이르러 백제(百濟)를 섬기다가 담(聃)이 별세한 후에는 여러 세대를 조공(朝貢)하지 아니하였다.
백제 동성왕(東城王) 경신에 탐라가 조공하지 아니하므로서 노여움을 사서 군사 사천기(四千騎)를 거느리고 남방으로 친정(親征)하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왕이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어 사죄하매 이를 파병(罷兵)하였다.
고려태조(高麗太祖) 이십일년(二十一年) 구삼팔년(九三八年) 무술(戊戌)에 탐라국왕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미로(未老)를 보내어 내조(來朝)하니 이에 성주(星主) 왕자작(王子爵)을 하사하였고 이로부터 세대마다 일차식 조근(朝覲)하였으며 왕국에 벼슬한 자는 없었으나 유(維)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을 시작하게 되었다.
문헌소개(文獻紹介)
영주지(瀛洲誌)는 탐라(耽羅)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文獻)으로서 현존하는 각종 문헌 중 가장 권위있는 정사본(正史本)이고 가장 오래된 최고본(最高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자(著者)나 간행(刊行) 연대는 미상이나 삼성신화(三性神話)로부터 시작하여 고려초(高麗初)까지의 탐라(耽羅)의 역사가 단행본으로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을 고찰컨대 고려말엽에 간행된 문헌으로 짐작된다.
그 후 탐라사(耽羅史)에 관하여 조선조초(朝鮮朝初)에 편찬된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은 영주지(瀛洲誌)를 인용하였다고 한다. 본 영주지(瀛洲誌)의 원본(原本)은 창경원(昌慶苑) 장서각(藏書閣)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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