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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씨파보서(濟州高氏派譜序)(임술보(壬戌譜))

admin 2026.09.14 16:54 48

濟州高氏派譜序(壬戌譜)

恒人之情於其祖先宗族遠則易忘疎則易忽鮮有能自近而溯遠由親而及疎盖淵明之於長沙少陵之於濟皆以同出曾大父之親猶有躊躇防猜之意則濟及長沙之不重宗盟槩可知矣未嘗不慨然于千載之下矣一日高氏門中都有司敎官璧煥與其族主事濟送來告不侫曰惟我濟州氏自始祖瀛洲君乙那世襲星主數千餘年至靈谷先祖以 太宗命始家漢京而墓于金川之江陰金城北面一開三所里也以尙闕羨道之刻諸雲仍尋常慨然顧歎乃於徃歲之辛酉始克如儀又收是祖以下爲派譜將有事于剞劂氏而前後經紀矻矻殫誠者海州族人在權也子盍侈之以文侫歛袵復之曰諸公之於是役不于也有聞者而必于不侫其無乃以觀瀾舊誼歟苟若是也其何忍辭而自老蘇以來千百年之間序者引者不知幾千百家公家舊弁之作亦不止一再矣更將何語以謝諸公不鄙之誼也噫遠而五百年近而三數世荏苒未遑一倡雲從揚先懿於麗牲之石將與天壤俱弊聚分流於剡藤之紙以作一家惇史誠可謂自近而溯遠由親而及疎其視恒人之情相去遠矣而特一高氏事耳推而廣之良夫二祖如吾始祖厥祖子孫如吾兄弟又推而廣之祖乎檀箕兄弟乎四海則天下事尙可爲也靈谷公諱得宗登第 太宗朝歷典淸要官至左參贊而常帶修文殿提學性至孝廬墓盡禮 太宗特命旌閭文章筆翰亦皆逼古七世孫晦早游兩宋先生門以經明行修聞同春追奪也與洪監司得禹諸公聯疏辨誣同被罪謫後以文谷金文忠諸公薦屢除官不就終以侍直是爲觀瀾齋璧松諸君其旁裔也

峕玄#閹茂(壬戌)之冬

通政大夫前行秘書監丞兼任太醫院少卿 原任奎章閣直閣德前殷 宋奎憲 書

 

 제주고씨파보서(濟州高氏派譜序)(임술보(壬戌譜))


항인(恒人, 보통 사람)의 정(情)이 그 조선(祖先)ㆍ종족(宗族)에 있어 멀면 잊기 쉽고 소원(疏遠)하면 소홀(忽)히 하기 쉬우니, 능히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를 거슬러 올라가고 친(親)함으로 말미암아 소(疏)함에 미치는 자가 드무니, 대개 연명(淵明, 도연명陶淵明)이 장사(長沙)에 대하여, 소릉(少陵, 두보杜甫)이 제(濟)에 대하여 다 증대부(曾大父, 증조부)의 친(親)함에서 같이 나왔으되 오히려 주저(躊躇)하고 시기(猜)를 방(防)하는 뜻이 있었으니, 제(濟)와 장사(長沙)가 종맹(宗盟, 종족의 맹약)을 중(重)히 여기지 않았음을 대개 가히 알 수 있으니, 일찍이 천재(千載, 천년)의 아래에서 개연(慨然)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루는 고씨(高氏) 문중(門中)의 도유사(都有司) 교관(敎官) 벽환(璧煥)이 그 족(族)의 주사(主事) 제송(濟送)과 더불어 와서 비녕(不侫, 저)에게 고(告)하여 가로되, 「오직 우리 제주(濟州) 고씨(高氏)는 시조(始祖) 영주군(瀛洲君) 을나(乙那)로부터 세습(世襲) 성주(星主)함이 수천여년(數千餘年)이러니 영곡선조(靈谷先祖)에 이르러 태종(太宗)의 명(命)으로써 비로소 한경(漢京, 서울)에 집을 이루고 묘(墓)는 금천(金川)의 강음(江陰) 금성북면(金城北面) 일개삼소리(一開三所里)에 있었으나, 오히려 연도(羨道, 묘 앞길)의 각(刻, 비문)이 궐(闕)함으로써 운잉(雲仍, 자손)이 심상(尋常)히 개연(慨然)히 돌아보며 탄식하다가, 이에 지난해 신유(辛酉)에 비로소 능히 의(儀)와 같이 하였고, 또 이 조(祖) 이하를 거두어 파보(派譜)를 만들어 장차 각수(剞劂氏, 판각)에 일을 두려 하는데, 전후(前後)로 경기(經紀)하여 몰몰(矻矻)히 정성을 다한 자는 해주(海州) 족인(族人) 재권(在權)입니다. 그대는 어찌 글로써 이를 치장(侈)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옷깃을 여미고 대답하여 가로되, 「제공(諸公)이 이 역사(役事)에 있어 저에게가 아니라도 (부탁할) 소문을 들은 자가 있을 터인데 반드시 저에게 함은 그 관란(觀瀾)의 옛 정의(舊誼)가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다면 그 어찌 차마 사양하리오. 노소(老蘇, 소순蘇洵)로부터 이래로 천백년(千百年)의 사이에 서(序)하고 인(引)한 자가 몇천백가(幾千百家)인지 알지 못하니, 공가(公家)의 옛 변권(弁卷, 서문)의 지음 또한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다시 장차 무슨 말로써 제공(諸公)의 비루(鄙)하지 않은 정의(誼)에 사례(謝)하리오」 하였다.

아아, 멀리는 오백년(五百年)이요 가까이는 삼수세(三數世)인데 임염(荏苒, 세월이 지체됨)하여 미처 한 번 창(倡, 앞장섬)함을 겨를치 못하였다가 운손(雲孫, 먼 후손)들이 서로 좇아 선의(先懿, 선조의 아름다움)를 드날리니, 여생(麗牲)의 돌은 장차 천양(天壤, 천지)과 더불어 함께 낡아질 것이요, 섬등(剡藤)의 종이에 나뉘어 흐름을 모아서 일가(一家)의 돈사(惇史, 돈독한 역사)를 지음이 진실로 가히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를 거슬러 올라가고 친(親)함으로 말미암아 소(疏)함에 미친다」이를 만하니, 그 항인(恒人)의 정(情)에 비하면 서로의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다만 한 고씨(高氏)의 일일 뿐이니, 이를 미루어 넓히면 양(良)ㆍ부(夫) 두 시조(始祖)가 나의 시조(始祖)와 같고 그 조(祖)의 자손(子孫)이 나의 형제(兄弟)와 같으며, 또 미루어 넓히면 조(祖)는 단군(檀君)ㆍ기자(箕子)요 형제(兄弟)는 사해(四海)이니, 곧 천하(天下)의 일도 오히려 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영곡공(靈谷公)의 휘(諱) 득종(得宗)은 등제(登第)하여 태종조(太宗朝)에 청요관(淸要官)을 두루 거쳐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항상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겸대(兼帶)하였으며, 성품(性品)이 지극히 효성(孝)스러워 여묘(廬墓)에 예(禮)를 다하니 태종(太宗)이 특명(特命)으로 정려(旌閭)하였다. 문장(文章)과 필한(筆翰) 또한 다 옛사람에 핍(逼, 가까움)하였다.

칠세손(七世孫) 회(晦)는 일찍이 양송선생(兩宋先生,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의 문(門)에 종유(游)하여 경명행수(經明行修, 경학에 밝고 행실을 닦음)로써 동춘(同春, 송준길)에게 알려졌고 추탈(追奪, 뒤에 관작을 빼앗김)을 당하였으며, 홍감사(洪監司) 득우(得禹) 제공(諸公)과 더불어 연소(聯疏, 함께 상소함)하여 변무(辨誣, 무고를 변명함)하다가 함께 죄(罪)를 입어 적소(謫所)로 귀양갔다. 뒤에 문곡(文谷) 김문충(金文忠) 제공(諸公)의 천거(薦)로써 여러 번 관직(官職)을 제수(除)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끝내 시직(侍直)으로써 마쳤으니, 이가 관란재(觀瀾齋)다. 벽송(璧松) 제군(諸君)은 그 방예(旁裔, 방계 후손)이다.


시(峕) 현효엄무(玄黓閹茂)(임술(壬戌))의 동(冬)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비서감승(前行秘書監丞) 겸임태의원소경(兼任太醫院少卿) 원임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덕전은(德前殷) 송규헌(宋奎憲) 서(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