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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곡공서세문(靈谷公序世文)

admin 2026.09.14 16:36 55

靈谷公序世文(庚午譜)

瀛洲, 在全羅道南海中, 水路九百七十餘里, 本九韓之一, 或稱毛羅, 九韓時創號, 或稱耽羅, 新羅時所封, 或稱耽毛羅, 百濟時所封也, 亦有泰岳, 峙其中, 張左右翼, 如一字橫舖, 名曰漢拏山, 以其雲漢可拏, 因謂之名, 此所謂瀛州, 地中之神明山也, 太初, 無人物, 忽有三神人, 從地中湧出于漢拏山之北麓廣壤地品字之穴, 名毛興穴, 三人之出, 正當九韓之時, 長曰高乙那, 次曰良乙那, 三曰夫乙那, 狀貌甚偉, 器度寬豁, 絶無人世之態也, 皮衣肉食, 常以遊獵, 爲事, 不成家業矣, 一日, 登漢拏山, 望見紫泥木函, 自東海中浮來, 欲留不去, 三人, 相謂曰異哉, 彼物也, 降臨就開則內有玉函, 形如島卵, 坼其封, 隱然羅衣淑余三人, 年皆十五, 六 容姿脫俗, 氣像, 窈窕, 各修餙而坐, 且持駒犢五糓種, 出置金塘之岸, 今朝天館下浦是也, 三神人, 自賀曰, 是天必授我三人也, 語未畢, 烏巾紅帶靑衣使者亦從(椷)中出, 稽顙再拜曰我是東海上碧溪國使者也, 吾王, 生此三女, 年俱壯長而求不得所耦, 嘗欲遺與者歲餘, 頃者, 吾王, 登紫霄閣, 望氣于西溟則紫氣連空, 瑞色, 葱籠, 中有絶岳, 湧出三人, 將欲開國, 各無配匹, 因此命臣, 侍三女而送, 願用伉儷之禮, 以成代業也, 己而忽然乘空而去, 莫知所之, 三人, 卽以潔牲, 告天, 以年次, 分娶之, 取泉甘土肥處, 射矢卜地, 高乙那所居, 曰第一都, 漢拏山之北一徒里, 今濟州也, 良乙那所居, 曰第二都, 漢拏山右翼之南土方里, 今大靜也, 夫乙那所居, 曰第三都, 漢拏山(左)翼之南土山里, 今旌義也, 自玆以後 始成産業, 植播五糓, 且牧駒犢, 日就當庶, 遂成人境, 蓋九百年之後, 三神人, 各自射石, 以試勇力高氏爲上, 良氏爲中, 夫氏爲下, 故民心, 幷歸于高氏, 以高爲君, 以良爲臣, 以夫爲民而國號, (毛) 牟, 以其牟糓茂盛之故也, 始祖高乙那十五世孫諱厚孕季兄弟三人, 造般渡海, 泊于耽津, 卽今康津蓋新羅盛時也. 于時, 客星, 見于南方, 太史奏曰異邦人來朝之象也, 俄而厚等, 至, 王, 大喜曰予以不德, 遽得貴客, 不亦悅乎, 以厚, 爲星主, 因其動星象也, 以孕, 令出袴下, 愛如己子, 改名淸以季, 爲徒內史失其名職 而國號, 耽羅, 以其初泊耽津而朝新羅(故), 名耽羅國也, 各賜衣冠寶盖, 護送南道, 車騎輜重, 大屬百里, 當此之時, 子孫, 繁盛, 敬事新羅, 以修藩臣之禮, 新羅烈宗朝, 耽羅王高聃, 遣廣巡使良宕, 按撫使夫繼良, 入朝新羅, 重賞爵祿, 且賜衣冠, 改良爲梁, 改夫爲浮, 蓋梁夫之姓, 自此始也, 耽羅王高聃, 諱厚之十二代孫也, 累歲服事新羅, 爲藩臣, 聃, 卒, 後繼來者曠世不朝, 東城王二十一年, 以耽羅, 不恭朝貢, 王, 於時, 發憤興師(率)驃騎, 親征南塞, 至武珍州今光州牧, 是也, 聃之十七世孫耽羅南化王昭聞之, 遣使乞罪, 乃止其兵, 其後, 又事百濟, 文周王改星主, 爲恩率, 二品官國號, 耽牟羅, 至文武王時, 更封佐平, 一品官至高麗太祖統合三韓, 改定律令以昭之四世孫高自堅, 還爲星主, 越三年, 遣兵討定耽羅, 降置郡縣, 自是, 高氏後裔通入麗朝, 屢世服爵. 太祖卽位二十一年, 耽羅王, 遣太子末老來朝, 賜星主王子爵, 肅宗時, 革爲郡, 毅宗時, 降爲縣, 末老之子維, 高麗靖宗乙酉, 首出南省試, 明年丙戌李作挺榜, 中以賓貢, 登第第三人, 官至右僕射, 維生兆基, 初名, 唐愈, 睿宗時, 登第, 官至政堂文學參知政事, 進中書侍郞平章吏部事兆基之孫適, 元宗辛酉, 登第, 卽入金閨, 因覲親還鄕, 其後, 屢起兵亂, 家國不寧, 避居林谿故, 子孫, 居林谿者亦有之, 適, 晦跡山林, 自足平生, 元宗, 聞其廉直, 甲午秋, 使柳希望, 命遣安車以迎之, 卽拜監察御使, 蓋昭之九世孫也, 自始祖幷計則五十世孫也, 元宗八年, 神義軍三別抄(叛), 入耽羅, 國家濟師討之, 盡殲然後, 以高氏, 爲本州留摠管, 特令安集餘民, 其後, 元牧子石加卑哨古道等, 自稱東西哈赤, 殺害官吏, 越六年壬子, 文臣輔遣其弟文臣吉, 以聞, 洪武七年, 卽恭愍二十三年甲寅是也, 秋八月, 遣左統使 崔瑩, 討平哈赤, 收其餘賊, 沒入于各司奴婢, 洪武二十五年(壬申)我 太祖卽位元年壬申, 是也, 又置牧使, 建文四年, 卽 我 太宗二年壬午也, 是年冬十月, 星主高禮鳳王子文忠世等, 以星主王子之爵, 似涉僭擬, 請改之, 以星主, 爲左都知管, 以王子, 爲右都知管永樂十四年卽 太宗十六年丙申, 從按撫使, 吳湜議, 改置三色曰, 濟州, 大靜, 旌義, 正統十年卽 世宗二十七年乙丑, 又革左右都知管, 以邑中有識人高承祖, 爲三邑都知上鎭撫適之十二代孫也, 幷計始祖則六十一世也, 適, 生汝霖世在兄弟, 汝霖, 耽羅妻之子也, 官至中書侍郞, 世在, 鷄林妻之子也, 亦至高官大爵云云, 適之九世孫臣傑, 有四子, 仁鳳義鳳禮鳳智鳳, 禮鳳, 有三子, 得侍得傳得信, 我是智鳳之獨子得宗也, 不啻獨子, 抑亦末子之後, 獨藏宗錄, 於意未安故, 傳授于四兄弟行, 湥藏勿失遺後萬世焉

世宗32年庚午(1450年) 正月 元日

嘉靖大夫行吏部尙書兼修文殿提學 後孫 得 宗 謹撰

 영곡공서세문(靈谷公序世文)

영주(瀛州)는 전라도(全羅道) 남해(南海) 중에 있으니 수로(水路) 구백칠십여리(九百七十餘里)라 본래 구한(九韓)의 하나이니 혹 모라(牟羅)라 칭함은 구한(九韓) 때에 창시한 칭호요 혹 탐라(耽羅)라 칭함은 신라(新羅) 때에 봉(封)한바요 혹 탐모라(耽牟羅)라 칭함은 백제(百濟) 때에 봉(封)한바라 또한 큰 산악(山岳)이 그 가운데 치립(峙立)하여 일자(一字)와 같이 가로 펴있으니 이름하여 한나산(漢拏山)이라 함은 그 구름하늘을 가히 반원(攀援)함으로써 인하여 이름함이니 이른바 영주(瀛州)는 지구(地球) 중에 신명(神明)한 산이라 태초(太初)에 인물이 없더니 문득 삼신인(三神人)이 한나산(漢拏山) 북쪽 기슭 광양(廣壤)의 품자혈(品字穴)에 솟아났으니 이름하여 모흥혈(毛興穴)이라 한지라 삼인(三人)의 남이정이 구한(九韓) 때를 당하니 장(長)은 고을나(高乙那)요 다음은 양을나(良乙那)요 셋째는 상모(狀貌)는 심히 위대하고 도량(度量)은 관활(寬豁)하여 조금도 이 세상의 태도는 없더라

피의(皮衣)를 입고 육식(肉食)을 하여 항상 유렵(遊獵)으로 일을 삼아 가업(家業)을 이루지 못하더니 하루는 한나산(漢拏山)에 올라 자니색목함(紫泥色木函)이 동해중(東海中)으로부터 떠와서 가지 아니 함을 바라보고 삼인(三人)이 서로 일러 같으되 기이하다 저 물건이여 내려와 열어 본즉 목함(木函) 안에 옥함(玉函)이 형상이 새알 같고 그 봉함(封函)을 깨니 은연히 바단 옷을 입은 숙녀(淑女) 삼인(三人)이 나이 모두 십오(十五), 육(六)세라 용자(容姿)는 세속에 벗어나고 기상은 요조(窈窕)하여 각각 단장하여 앉고 우마(牛馬)와 오곡종자(五穀種子)를 가져와 금당(金塘)의 해안(海岸)에 내놓으니 지금 조천관(朝天館) 하포이라 삼신(三神)이 스스로 축하하여 같으되 이는 하늘이 반드시 우리 삼인(三人)에게 주심이로다 말이 마치지 못함에 검은 건(巾) 붉은 띠 푸른 옷을 입은 사자(使者) 또한 함중(函中)으로부터 나와 두 번 절하여 가르되

『나는 이 동해상(東海上) 벽계국(碧溪國) 사자(使者)라 우리 왕(王)이 이 삼녀(三女)를 낳아 나이 함께 장성(長成)하되 짝할바를 얻지 못하고 일찍 한 해가 넘었는데 근자에 우리 왕이 자소각(紫霄閣)에 올라 천기(天氣)를 서쪽 바다에 바라본즉 자기(紫氣)는 연천(連天)하야 서색(瑞色)이 총총히 둘러싸고 가운데 높은 산악(山岳)이 있음에 삼신인(三神人)이 솟아나 장차 나라를 열고자하나 각각 배필(配匹)이 없음일세 이로 인하여 신(臣)을 명하여 삼녀(三女)를 모시고 보내니 원컨대 항려(伉儷)의 예(禮)를 올려서 대업(大業)을 이루라』 하고 이윽고 구름을 타고 가되 간바를 알지 못하니라

삼인(三人)이 곧 희생(犧牲)으로써 천(天)에 고하여 나이 차례로써 나누어 혼취(婚娶)하고 물 좋고 토지 비옥한 곳을 택하여 활을 쏘아 따를 점치니 고을나(高乙那)의 거하는바는 제일도(第一都)라 한나산(漢拏山)의 북쪽 일도리(一徒里)니 지금 제주(濟州)요 양을나(良乙那)의 거하는바는 제이도(第二都)라 한나산(漢拏山)의 우익(右翼) 남쪽 산방리(山方里)니 지금 대정(大靜)이오 부을나(夫乙那)의 거하는바는 한나산(漢拏山) 좌익(左翼)의 남쪽 토산리(土山里)니 지금 정의(旌義)라 일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五穀)을 갈고 또 우마(牛馬)를 길러 날로 부(富)하고 커짐에 나아가 드디어 사람 사는 경계를 이루니라

대개 구백년(九百年)이 경과한 뒤에 삼신인(三神人)이 각기 활(돌)을 쏘아 용력(勇力)을 시험하니 고씨(高氏)가 상(上)이 되고 양씨(良氏)가 중(中)이 되고 부씨(夫氏)가 아래된지라 민심이 다 고씨(高氏)로 돌아가 고씨(高氏)로써 군(君)을 삼고 양씨(良氏)로써 신(臣)을 삼고 부씨(夫氏)로써 민(民)을 삼고 국호(國號)를 모라(牟羅)라 하니 그 보리곡식이 무성하는 연고로써라

시조(始祖) 고을나(高乙那)의 십오대손(十五代孫) 후(厚)와 잉(孕)과 계(季) 형제(兄弟) 삼인(三人)이 배를 저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머무르니 곧 지금 강진(康津)이니 대개 신라(新羅)의 융성한 때라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南方)에 나타나니 태사(太史) 여쭈어 가로되

이방(異邦)의 사람이 내조(來朝)하는 상(相)이라

이윽고 후(厚) 등이 이르니 왕(王)이 크게 기뻐하여 가로되

나의 부덕(不德)으로써 문득 귀객(貴客)을 얻으니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후(厚)로써 성주(星主)를 삼으니 그 성상(星象)이 동함을 인함이오 잉(孕)으로 다리 아래로 나오게 하여 이름을 고쳐 청(淸)이라 하고 계(季)로써 도내(徒內)(사가(史家) 그 직(職)을 이름한 이유를 실(失)함)를 삼고 국호(國號)를 탐라(耽羅)라 하니 그 처음 탐진(耽津)에 머물고 신라(新羅)에 조회한 연고로 탐라국(耽羅國)이라 이름함이라 각각 의관(衣冠)과 보개(寶盖)를 주어 남도(南道)에 호송하니 차기(車騎)와 치중(輜重)이 크게 백리(百里)에 연속하니라

이때에 자손이 번성하여 삼가 신라(新羅)를 섬겨서 번신(藩臣)의 예(禮) 닦으니라 신라(新羅) 열종(烈宗) 때에 탐라왕(耽羅王) 고담(高聃)이 광순사(廣詢使) 양탕(良宕)과 부계량(夫繼良)을 보내어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할세 작록(爵祿)을 후하게 주고 또 이관(異貫)을 주어 양(良)을 고쳐 양(梁)이라 하고, 부(浮)를 고쳐 부(夫)라 하니 대개 양부(梁夫)의 성이 이로부터 비롯한지라

탐라왕(耽羅王) 고담(高聃)은 후(厚)의 십이세손(十二世孫)이라 여러 해 신라(新羅)를 복종하여 섬겨 번신(藩臣)이 되더니 담(聃)이 졸(卒)함에 후에 이어오는자 여러 해를 조공(朝貢)하지 아니하니라

동성왕(東城王) 이십일년(二十一年)에 탐라(耽羅)로써 조공하지 아니함이 불공(不恭)타하여 왕이 이에 발분(發憤)하여 군사 일으키고 표기병(驃騎兵)을 거느려 친히 남방을 정벌하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지금 광주목(光州牧)이니라 담(聃)의 십칠세손(十七世孫) 탐라(耽羅) 남화왕(南化王) 소(昭)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어 이에 그 병(兵)을 그치니라 그 후에 또 백제(百濟)를 섬기니라

백제(百濟) 문주왕(文周王)이 성주(星主)를 고쳐 은솔(恩率=이품관(二品官))이라 하고 국호(國號)를 탐모라(耽牟羅)라 하고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이르러 고쳐서 좌평(佐平=일품관(一品官))을 봉(封)하고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삼한(三韓)을 통합함에 이르러 율령(律令)을 개정하여 소(昭)의 사세손(四世孫) 고자견(高自堅)으로써 다시 성주(星主)를 삼고 그 후 삼년(三年)에 군사를 보내어 탐라(耽羅)를 토정(討征)하고 군(郡)과 현(縣)을 두니 이로부터 고씨(高氏)의 후예(後裔) 여조(麗朝)에 들어 여러 대를 작(爵)을 세습(世襲)하니라

고려(高麗) 태조(太祖) 이십일년(二十一年)에 탐라왕(耽羅王)이 태자(太子) 말로(末老)를 보내어 내조(來朝)할 때 성주(星主) 왕자작(王子爵)을 주고 숙종(肅宗) 때에 고쳐 군(郡)이라 하고 의종(毅宗) 때에 나리워 현(縣)이라 하니라

말로(末老)의 아들 유(維)는 고려(高麗) 정종(靖宗) 을유(乙酉)에 남성시(南省試)에 제일(第一)이 되고 명년(明年) 병술(丙戌) 이작정(李作挺)의 방(榜)에 빈공(賓貢)으로써 합격하여 제삼인(第三人)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고 유(維)는 조기(兆基)를 낳으니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니 예종(睿宗) 때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참지정사(政堂文學參知政事)에 이르러 중서시랑평장이부사(中書侍郞平章吏部事)에 오르고

조기(兆基)의 손(孫) 적(適)은 원종(元宗) 신유(辛酉)에 등제(登第)하여 금규(金閨)에 들었다가 성친(省親)으로 환향(還鄕)하고 그 후에 자주 병란(兵亂)이 일어나 국가 불안할세 임계(林谿)에 피거(避居)함으로 자손이 임계(林谿)에 사는자 또한 있으니라 적(適)은 산림(山林)에 자취를 감추어 평생을 자족(自足)하니 원종(元宗)이 그 청렴(淸廉) 정직(正直)함을 듣고 갑오(甲午) 가을에 유희망(柳希望)으로 하여금 안거(安車)를 보내어 마지하여 곧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재주(除授)하니 대개 소(昭)의 구세손(九世孫)이라 시조(始祖)로부터 계산한 즉 오십세손(五十世孫)이라

원종(元宗) 팔년(八年)에 신의군삼별초(神義軍三別抄) 배반하여 탐라(耽羅)에 들어오거늘 국가군사로써 토벌하여 다 죽인 뒤에 고씨(高氏)로써 본주(本州) 유총관(留摠管)을 삼아 특령(特令)으로 백성들을 안집(安集)하게 하고 그 후에 원(元)나라 목자(牧子) 석가비(石加卑)와 초고도(硝古道) 등이 동서합적(東西哈赤)이라 자칭하여 관리를 살해하니 그 뒤 육년(六年) 임자(壬子)에 왕자(王子) 문신보(文臣輔)가 그 아우 문신길(文臣吉)을 보내어 아뢰니라

명(明) 홍무(洪武) 칠년(七年)은 곧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이십삼년(二十三年) 갑인(甲寅)이라 가을 팔월(八月)에 좌통사(左統使) 최영(崔瑩)을 보내어 합적(哈赤)을 토평(討平)하여 그 여적(餘賊)을 거두워 각 관사(官司)의 노비(奴婢)에 충당하고

명(明) 홍무(洪武) 이십오년(二十五年)은 곧 이태조(李太祖) 즉위(卽位) 원년(元年) 임신(壬申)이라 또 목사(牧使)를 두고 명(明) 건문(建文) 사년(四年)은 곧 이조(李朝) 태종(太宗) 이년(二年) 임오(壬午)라 이해 겨울 십월(十月)에 성주(星主) 고예봉(高禮鳳)과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성주(星主) 왕자작(王子爵)으로써 외람함에 가까울 듯 하다하여 청하여 고쳐 성주(星主)로써 좌도지관(左都知管)이라 하고 왕자(王子)로써 우도지관(右都知管)이라 하고

명(明) 영락(永樂) 십사년(十四年) 곧 태종(太宗) 십육년(十六年) 병신(丙申)에 안무사(安撫使) 오식(吳湜)의 제의에 따라 삼읍(三邑)을 두어 제주(濟州) 대정(大靜) 정의(旌義)라 하고

명(明) 정통(正統) 십년(十年) 곧 세종(世宗) 이십칠년(二十七年) 을축(乙丑)에 또 좌우도지관(左右都知管)을 고쳐 읍중(邑中) 유식인(有識人) 고승조(高承祖)로써 삼읍도지상진무(三邑都知上鎭撫)를 삼으니 적(適)의 십이세손(十二世孫)이라 시조(始祖)로부터 계산한 즉 육십일세(六十一世)라

적(適)은 여림(汝霖) 세재(世在) 형제(兄弟)를 낳으니 여림(汝霖)은 탐라(耽羅) 적(適)의 아들이라 벼슬이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이르고 세재(世在)는 계림(鷄林) 적(適)의 아들이니 또한 고관대작(高官大爵)에 이르다.

적(適)의 구세손(九世孫) 신걸(臣傑)이 사자(四子)를 두니 인봉(仁鳳) 의봉(義鳳) 예봉(禮鳳) 지봉(智鳳)이요 예봉(禮鳳)은 삼자(三子)를 두니 득부(得傅) 득시(得侍) 득신(得信)이오 나는 지봉(智鳳)의 독자(獨子) 득종(得宗)이라 독자(獨子)일뿐 아니라 또한 말자(末子)의 후(後)로 홀로 족보(族譜)를 간수함이 미안함으로 사형제항(四兄弟行)에 전하여주니 깊이 간수하고 잃지말아 후손(後孫) 만대(萬代)에 남길지어다.


주(註)

서세문(序世文)에는 인봉(仁鳳), 의봉(義鳳), 예봉(禮鳳), 지봉(智鳳)으로 되어 있으나 이조실록(李朝實錄) 또는 직지(直旨), 동문선(東文選)의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봉인(鳳仁), 봉의(鳳義), 봉례(鳳禮), 봉지(鳳智)로 되어있음.


세종(世宗) 삼십이년(三十二年) 경오(庚午)(일사오공년(1450年)) 정월(正月) 원일(元日)

가정대부행이부상서겸수문전제학(嘉靖大夫行吏部尙書兼修文殿提學) 후손(後孫) 득종(得宗)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