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씨의 시조는 탐라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 가운데 한 사람인 고을나(髙乙那)이다. 탐라 개국설화에 의하면, 한라산 북쪽 기슭 삼성혈(三姓穴)에서 양씨, 부씨와 함께 세 신인(神人)이 출현하였다. 그 후 제주도로 표류(漂流)해 온 상자에서 세 명의 여자, 오곡종자(五穀種子), 가축이 나와 이들과 함께 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1451년에 완성된『고려사』 권57, 지제11, 지리(地理)2 에 의하면, 고을나의 15세손 고후(髙厚)·고청(髙淸)·고계髙(季) 세 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 : 現 전라남도 강진군)에 이르렀고, 신라에 내조(來朝)하여 고후는 성주(星主), 고청은 왕자(王子), 고계는 도내(徒內)라는 칭호를 받았다. 처음 왔을 때 탐진에 정박하였기 때문에 탐라(耽羅)라는 국호(國號)를 받았다.[1]

고을나의 45세손 탐라국주 고자견(髙自堅)의 태자 고말로(髙末老)가 938년(태조 21년) 고려에 내조(來朝)하여 성주(星主)·왕자(王子)의 작(爵)을 받았고, 자치를 허락받았다. 이후 조선 초기까지 후손들이 성주의 칭호를 계승하며, 탐라국을 세습 통치하였다.

고말로의 세 아들인 고유(髙維), 고강髙(綱), 고소(髙紹)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고유髙(維)의 아들인 고조기(髙兆基)가 고려 의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2]

제주 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4명, 무과 급제자 225명을 배출하였다. 장흥 고씨, 개성 고씨 등 분적종을 합하면 문과 급제자 79명, 무과 급제자 289명이다.

분파

  • 성주공파(星主公派): 고인단(髙仁旦)
  • 전서공파(典書公派): 고신걸(髙臣傑)
  • 영곡공파(靈谷公派): 고득종(髙得宗)
  • 문충공파(文忠公派): 고경(髙慶)
  • 장흥백파(長興伯派): 고중연(髙仲莚)
  • 화전군파(花田君派): 고인비(髙仁庇)
  • 문정공파(文禎公派): 고택(髙澤)
  • 상당군파(上黨君派): 고공익(髙恭益)
  • 양경공파(良敬公派): 고령신(髙令臣)

성주공파, 전서공파, 영곡공파는 각각 중시조 고말로의 10세손 고인단, 13세손 고신걸, 15세손 고득종을 파조로 두고 있다. 그러나 혈연관계로 보면 이들은 모두 중시조 13세손이자 16대 성주였던 고신걸의 후손이다. 당시에 이 집안은 다른 친척들이 일찍이 고려로 이주하는 동안 성주 자리를 세습하며 계속 제주도에 남아있었다.

족보상으로는 성주공파가 초대 성주 고말로의 장자직계이지만 이름과는 달리 성주공파의 고말로 15세손 고득남은 마지막 성주인 14세손 고봉례의 직계가 아니다. 족보상으로 고득남은 15대 성주 고명걸의 직계인데, 당시 시대는 원나라가 망하던 여말선초의 대혼란기였으며 심지어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 성주까지 죽이겠다고 날뛰자 고명걸은 성주 자리를 사촌동생 고신걸에게 넘기고 숲속에 은거하였다.

그 후 고신걸은 성주 자리를 자신의 셋째 아들인 고봉례에게 물려주었으며 심지어 고명걸의 아들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고말로의 장자계통의 대가 끊긴 셈이 되었다. 그래서 고신걸의 손자인 고득남을 고명걸의 손자로 입양시켜서 대를 잇게 하였고 그 후손이 성주공파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고득남의 출계 처리는 고득남의 세대나 그보다 훨씬 후대에에서야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씨의 계보를 최초로 문서화한 ‘성주고씨가전’이나 ‘장흥고씨가전’은 고득남과 같은 세대인 고득종이 관여해서 작성되었으며, 그 이전까지 고씨 집안은 ‘가문의 계보’라는 유교적인 개념을 접하지 못한 듯하다. 애초에 조상을 공경하기 위해 매장하여 봉분을 만드는 유교식 장법을 제주도에 최초로 도입한 것도 고득종이었고 당시의 다른 탐라인들은 고유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고득남 이외의 나머지 고신걸의 손자들은 전서공파로 분파되었다. 이전세대까지 탐라의 성주는 탐라를 다스리면서도 고려나 조선의 수도에서 자주 지내면서 본토의 권력층과 교류해왔는데, 당시에 마지막 성주 고봉례가 성주직을 조정에 반납하고 탐라가 조선의 통치체제에 편입되면서 고신걸의 손자 세대는 더이상 지방 토호로서는 중앙 정계와 연이 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성주공파와 전서공파는 제주도의 토호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신걸의 손자 고득종은 다시 전서공파에서 갈라져나와 영곡공파의 파조가 된다. 고득종은 유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문과에 급제해서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 이질적인 성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명의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자식농사 대박을 터트리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에 기반을 둔 영곡공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현대에는 제주도에서 성주공파와 전서공파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영곡공파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